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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믿음을 가져라

chajchul 2015. 1. 21. 12:31



어느 해 여름, 하계 대학을 개강하였을 때, 나는 성경 교리 강좌를 맡아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올라온 국민학교 교사로부터 중고등학교 교사들 30여명이 수강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내용을 강의하고 있을 때였다고 생각되는데,

어떤 여선생님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합니까?

세상에는 인간이 갈 바른 길을 가르치는 종교들이 많은데요. 아무래도 그 주장은 기독교의 독선 같아요."
"예를 들자면, 어떤 종교들을 두고 말씀하십니까?"
"굳이 특정 종교가 아니라도 말입니다. 가령 우리나라 같으면 불교나, 유교나, 또는 마호메트교 등등 말입니다."
"예, 고맙습니다. 질문을 해 주셔서. 이제 강의가 진행되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때 대답을 듣기로 하지요."

독선인가 사실인가
이런 질문을 생각하면 사람이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왜? 왜? 꼭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라고 말합니다. 서울가는 길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어느 길로 가든지 서울만 가면 됩니다. 혹시 고생하면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더러는 편안히 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편한 길을 알기만 한다면 편한 길을 따라 서울로 가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특별한 목적이 있으면 일부러 고생스러운 길을 택하기도 하겠지만,

어떤 길을 택하였든지 서울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지요.
그런데 서울 가는 길이 오직 한 길 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라는 말이 통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한 길, 그 길밖에는 서울 가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은 우문입니다.

만일 서울 가기를 원한다면 한 길 밖에 없는 그 길로 가야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를 믿은 그 길밖에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구원을 얻어야할 수밖에 없는 모든 아담의 후손들의 유일한 구주라고 단언합니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왜? 납득이 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까?

이슬람교나 불교나 기타 다른 종교는 왜 구원의 길이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독선적이라고 매도합니다.

"심지어 요즘은 기독교 안에서도 이런 주장은 독선적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너그러운 학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다 선을 지향하고 인류의 구원을 전하고 있으니 연합해서 서로 이해하고 관용하며 보완해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협력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면 배타적이라고 호통입니다.
"과연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 - 종교가 아니라도 구원을 주장하는 어떤 사상들과 연합하고

협력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까? 성경은 단호히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아버지께로 온다는 것은 사람이 생명의 근원에 이른다는 것이며,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오직 예수 안에서만 생명의 원천에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이 없다는 말씀이지요.
성경은 이런 주장을 사리에 맞지 않게 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만이 유일하게 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모든 후손은 죄인입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사망의 존재라는 뜻임을 지난번에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죄에서 구원하려면 그 구주는 죄인이 아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일 죄인이면 그도 그 죄로 인하여 사망이 된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죄인들의 죄와 사망을 그가 대신 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구주라면 그는 죄가 없어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죄의 두면
예수님은 과연 죄인이 아닙니까? 그는 참으로 죄가 없습니까? 어떻게 그렇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죄인이라고 성경이 말할 때 두가지 면으로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는 본질적인 면입니다.

즉 사람은 생래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생래적인 죄인인 사람이 살아가면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첫째 것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라고 말하고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5)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 둘째 것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고 말하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엡 4:18,19,22)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둘째 것은 첫째 것의 자연적인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주가 되실 분은 이 두가지 죄가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만일 이 두가지 중에 하나만이라도 있다면

그는 구주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는 이 두 측면의 죄가 과연 없습니까? 물론입니다.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고후 5:21)셨습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이 말씀들은 예수님이 "본질 상 진노의 자식"이 아닌 근본적이며 본질적으로 죄가 없으며 죄인이 아니라는 주장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죄악 중에 출생하지 않았고 모친이 죄 중에 잉태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즉 썩지 않을 씨 곧 생명 자체로 탄생하셨단 말입니다.
이 주장이 옳은지 우리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가라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증명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창조된 남 녀
이 문제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때로 거슬러 올라가봐야 합니다. 어떻게 사람을 창조하셨으며,

모든 인류는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3권에서 약속하였듯이 아담이 범죄했는데 왜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어

구원받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지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아담 하나를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그 사람이 산 존재가 되게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

여기 "기운"이라는 말은 창세기 2:7의 "생기"라는 말과 같은 "네샤마( )"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생기 혹은 기운은 사람을 지성적인 존재가 되게 하였습니다.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욥 32:8)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담 곧 사람은 흙으로 지은바 되었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산 존재가 되었고

또한 이성(理性)이 있는 존재 즉 총명이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창조는 좀 다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는 엿새 동안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둘째 날은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은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1:6∼8).

그런데 여섯째 날에는 "좋지 못하다"(창 2:18)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였습니다. 왜, 전지하신 하나님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한 줄을 미리 몰라서

남자 하나를 지어놓으신 후에 좋지 못하다는 말씀까지 하시면서 먼저 남자 하나만을 지으셨을까요?

또한 여자를 지으실 때는 흙으로 짓지 아니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창 2:21,22)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만드신 여자에게는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실지로는 불어넣었을는지 모르지만 계시로 주신 성경 기록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 무슨 깊은 의미가 없을까요? 있습니다.

아주 깊은 복음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오직 한 생명의 한 통로만 주신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생명을 아담에게 불어 넣어 주시고,

아담에게 주신 그 생명으로부터 여자에게 생명이 나누어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자에게는 하나님이 직접 생명을 불어넣지 아니하고 아담에게서 생명을 나누어주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 한 줄기로 흘러 내리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생명의 일원성(一元性)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여자는 아담에게서 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남자가 여자에게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고전 11:8)라고 말합니다.
났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부모에게서 났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나의 존재와 생명은 부모로부터 나왔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처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고 하는 것은 여자의 존재와 생명이 남자 곧 아담에게서 나왔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담을 떠나서 여자의 존재와 생명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난 것입니다. 아담이 없었다면 여자는 결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담의 허리에서 창조된 인류
하나님은 이와 같이 여자를 남자에게서 나게 하신 후에 결혼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로 만드신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

17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2∼24).

그리고 하나님은 이 새 가정에 축복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이 축복이 선언되는 때가 오늘날 이 세상의 모든 인류가 창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선언 속에 여러분과 내가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록 잉태하는 모든 아기를 그 순간 순간 직접 창조하지는 아니하실지라도,

태초에 인류의 시조 내외에게 생육과 번성을 명령하신 것으로 아담의 모든 후손은 이미 창조 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그들의 부모에 의해 그들이 태어날 시간이 각기 다른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후손의 존재를 그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멜기세댁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히 7:10).

레위는 아브라함의 증손자입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아브라함은 죽은 후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레위를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와 같은 논리로 모든 인류는 아담의 허리에 있었습니다. 아담이 없었으면 우리는 아무도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최초의 여자도 역시 그렇지요. 그래서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고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음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남녀가 동침하여 태어난 어떤 사람도 아담의 후손이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담의 후손은 누구든지 예외 없이 이미 아담 안에서 아담의 허리에서 죽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여자 외에는 한 생명도 낳기 전에, 3장 "사람은 왜 믿고 살아야 합니까?"에서

설명한대로 자신을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으로는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스스로 선악과를 먹었으니 죽었고, 아담은 여자가 선악과를 따서 줌으로 먹고 그의 허리에 있는

그의 모든 후손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손수 창조한 그 상태 그대로의 사람을 땅에 충만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처음 창조된 아담이 아닌 다른 아담을 다시 만들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처음 창조한 아담 그대로의 의식과 인격을 가진 바로 그 아담을 다시 있게 해야만 합니다.

즉 인격이 같은 아담을 존재하게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창조 사업은 일차 실패한 것과 같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고 선고하기 전에,

여자를 꾀어 선악과를 먹게한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선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잉태의 고통과 해산이 수고를 더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3:16).

이런 일련의 선고는 아담을 구원하여 창조의 원래 목적을 성취하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포였습니다.

그런 후에 아담에게 흙으로 돌아 가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약속한 다음에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하와라는 이름을 지은 때
많은 사람들은 아담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 - 영어로는 이브 - 라고 알고 있으나,

그 이름이 언제 지어졌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차근 차근 살피는 대신 선입관을 가지고 읽기 때문입니다.

하와라는 이름은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선고가 있은 다음에 아담이 여자인 그 아내에게 지어준 이름입니다.

그 뜻을 직설적으로 말하면 "생명"입니다.
아담이 이런 이름을 지은 것은 아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므로 잃어버린 영생을

하나님이 여자를 통하여 회복시켜 주실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라는 말씀의 뜻을 아담이 확실히 이해하였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사건이 가르쳐주는 진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아담의 후손은 아담 안에서 다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죽은 생명과 상관없는 한 다른 생명을 일으키시고

그가 아담의 죽음을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의 생명 안에서 아담과 아담 안에서 죽은

아담의 모든 후손이 생명으로 회복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아담의 허리 곧 죽은 아담의 죽은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자체로서 남자와 상관없이

오직 여자만으로 잉태 생산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자의 후손인 것입니다.

모든 아담의 후손은 남자의 후손이고, 아담의 생명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생명 자체로 여자에게서 탄생할 새로운 생명의 근원은

남자와 상관없는 여자에게서 탄생하실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갈 4:4)셨습니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천사가 일러 가로되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26∼35).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마 1:18)습니다.
여자에게 나신 하나님의 아들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남자를 알지 못한, 남자와 동침한 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에게서 탄생하셨습니다.

곧 아담의 죽은 생명과 상관없이 탄생하셨다는 말입니다.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24,25).

그래서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아니요 죄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본질상 생명이십니다(요 1: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3,24)

여자의 후손
예수님의 생명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아담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났다는 사실을 비웃습니다.

심지어 신학자들까지도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의 생명으로 아담의 생명과 상관없는,

죄없이 오신 구주라는 증명으로 삼으셨습니다.

만일 구주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지 않았으면 그는 전혀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순결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얼마나 확실합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본질상으로 죄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인 모든 아담의 후손을 죄에서 구속하실 본질적인 자격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는 동안에 그 스스로 지은 죄도 없습니다.

33만일 그가 본질적으로 죄가 없더라도 사람되어 세상에 오셔서 사는 동안에 도덕적으로나 율법상으로나

죄를 지으면 죄인이 됩니다. 그래서 그의 죄 없는 본질을 더럽히고 맙니다.

사실 아담도 본질상 죄 없이 지음을 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함으로 죄인이 되어 죄 없는 그의 본질을 더럽히고 죄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도 죄를 범하면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성공적으로 사셔야 하였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삶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를!
아담은 죄가 전혀 없는 환경에서 죄없는 본성을 가지고 연약하지 않은 완전한 육신을 가지고 마귀의

유혹에 걸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그의 생명의 본질은 결코 죄가 없지만 그의 몸을 이루고 있는 육신은,

아담 안에서 죄의 영향으로 연약하여진 육신입니다. 이 말은 그의 육신에 죄가 있다거나,

그의 육신에 죄성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몸을 이루고 있는 재료인 살(肉)이 아담의 후손들의 살과 같다는 뜻입니다.

피곤하고, 맞으면 아프고, 자야하고, 먹지 않으면 시장하고, 찔리면 피가 나고,

이런 것들이 우리와 꼭 같다는 말입니다. 몸이 가진 생리 현상이 우리와 전혀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죄를, 악한 자의 모든 공격을 이기고 결코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사는 일의 어려움을

우리는 가히 상상하지도 못합니다. 마귀는 최초에 여자를 공격하여 정복하자마자

그 여자는 마귀의 편이 되어 아담을 공격하는 일에 가장 효과적인 마귀의 조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조수가 하나뿐이었으나 예수님의 경우는 온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다 마귀의 조수였습니다.

심지어 그의 모친?? 형제와 제자들까지 다 자기들도 모르게 때때로 마귀의 조수노릇을 하여

예수님을 죄에 빠드리려고 공격함에랴!(요 2:3 ; 막 3:21,31,32 ; 마 16:21∼23 등)
사단은 그의 조력자들과 함께 생활의 범사에 예수님을 공격하였으나 특히 이런 연약성을 집중적으로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40일 금식하시고 시장하실 때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공격했고,

고단하여 배의 고물을 베고 주무실 때 광풍으로 공격했고, 겟세마네 동산의 그 고통의 시간에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슈퍼맨의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공격에 우리만큼 약하게 무너질 수 있는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한번도, 정말 결코 단 한번도 죄를 짓지 않으시고 그 모든 공격의 순간들을 이기셨습니다.

그분은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요 8:46). 또한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요 14:30,31). 세상 임금은 사단을 가리킵니다(눅 4:5,6 ; 엡 6:11,12).

사단이 와서 예수님께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시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만 하고 말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결과적인 표현의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특히 존경하는 랍비 힐렐에게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는 성낼줄 모르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짖궃은 사람이 그를 성내게 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내기를 걸었습니다.

만일 자기가 힐렌을 성내게 하면 돈을 먹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안식일 예비일을 기회로 잡고 랍비가 안식일 준비를 위하여 목욕하는 시간에 그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힐렐은 목욕가운을 걸치고 문을 열었습니다.
"형제여, 어떤 일로 오셨소?"
"예, 랍비님, 사람의 머리는 왜 둥글게 생겼습니까?"
랍비는 열심히 그 대답을 하느라 애를 썼습니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떠나왔다가,

잠시 후 랍비가 막 목욕물을 뒤집어썼을 때쯤 또 문을 두드렸습니다.

랍비는 물이 뚝뚝 흐르는 모습으로 내다보았습니다. 또 그 사람이 아닙니까?
"형제여 무슨 일이 또 생겼습니까?"
"아, 예, 랍비님, 흑인은 왜 까맣지요?"
힐렐은 또 열심히 설명을 해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또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와보니 역시 그 사람입니다.

안식일을 예비하는 몹시 바쁜 시간에 쓸데없는 질문을 위하여 무려 다섯 차례나 방문한 그에게

힐렐은 시종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대하였습니다.

그만하면 성을 낼만도 한데 도무지 성낼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짓꾿은 사람은 마지막으로 찾아갔습니다.

역시 랍비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그를 맞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는 되레 자기가 성을 벌컥 내었습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형제여 왜 그러시오? 뭣이 잘못 되었소?"
"당신 때문에 내가 돈을 잃었단 말이오."
그제서야 그 사람이 그렇게 성가시게 군 이유를 안 힐렐은 말했습니다.
"형제여, 그대가 돈을 잃는 것이 내가 참을성을 잃는 것보다 낫지 않소?"
그 짓꾿은 사람은 결코 힐렐이 성을 안낸다는 증명을 하기 위하여 그를 성가시게 군 것이 아니었습니다.

꼭 성내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랍비 힐렐은 결코 성을 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세상에 증거하고 만 것이 되었습니다.
사단의 예수님께 대한 공격이 이와 같습니다.

사단의 집요한 공격은 오히려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행한다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범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생각으로도 범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야만 모든 죄인의 대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벧전 2:22,23)셨습니다.

그는 아담의 모든 후손보다 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결코 죄를 짓지 않으심으로 대속자로서의 자격을 흠없이 유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고후 5:21)실 수가 있었고 예수님 자신도 마침내 그날이 이르렀을 때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벧전 2:24)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천하 인간 중에 이러한 분이 예수님 외에 또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 결코 없습니다.

예수님 외의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미 아담 안에서 다 죽은 자들이 뿐입니다.

오직 예수, 예수님만이 아담의 생명과 상관없는 당신 자신의 생명으로 오신 여자의 후손이며 본질적으로도 생활의

행위로도 죄가 없으시므로, 본질적으로 진노의 자식이며 그래서 생활에 죄의 열매만을 주렁주렁 맺히는

우리 모든 아담 안에서 죽은 아담의 후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합리적인 질문
이러한 설명이 성경이 가르치는 합리적인 복음의 사실일지라도 아직도 의문의 여지는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1900여년 전에, 공간적으로는 유대 땅에서 한 사람 예수가 죽었는데 어떻게 아담의 모든 후손이 그를 믿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또 나는 시간적으로 1900여년 후의 사람이요 공간적으로는 한국 사람인데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나와 개인적이며 유기적이며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참으로 있을만한 질문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로마서 5장 12∼21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부모와 직접적이며 유기적이며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부모님이 없었다면 내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고조부나 혹은 그 윗대의 조상을 보지 못하였고 대개는 이름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조상들과 직접적이며 유기적이며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없었으면 나는 없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담이 없었으면 나는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롬 5:1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십니다.(고전 15:45).

그래서 예수님은 아담을 대신하여 그의 죄와 사망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이제는 아무도 아담의 죄 때문에 죽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아담의 모든 후손이 이미 죄없이 깨끗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중에 태어나고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상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될 모든 조처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취해졌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하고 예수께서 이 모든 죄와 사망을 처리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과 같은 이치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됩니다.

그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이 중생에는 아담의 모든 후손이 다 참여할 수 있습니다. 결코 제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모든 생명이 아담의 허리에 있었던 것과 같이 영생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허리에 있으며,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의 존재로 태어난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각자가 생명의 존재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내가 개인적이며 유기적이며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과 똑 같은 이치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과 부활은

우리 모든 사람과 개인적이며 지속적이며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마지막 아담 예수는 사람되어 오셔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살려 주는 영이 되신 것뿐만 아니라,

태초부터 살려 주는 영이셨습니다.

흙으로 아담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아담을 산 영이 되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요 1:1∼3 참고).

그 안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으로 부활하시고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아담의 죄 때문에 영원히 멸망에 이른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된 죄는 누구에게든지 깨끗이 없어질 수 있도록 이미 예수께서 처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것은

예수께서 이루신 이 속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까?
그분만이 여자의 후손이요 그분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출처 : 믿음의 노래 당신은 예수 믿어야 될 사람
글쓴이 : 믿음의 노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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