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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복음에 담긴 5가지 정신!! ♤

chajchul 2023. 3. 30. 13:19

     ♤ 복음에 담긴 5가지 정신!! ♤

본문: 마태복음 1장 1-6절

모든 것에서 첫 인상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첫 인상은 그리 화려하지 못합니다. 족보가 나오고 지루합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 믿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족보 속에는 놀라운 복음적인 메시지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신학교 들어가서 말씀을 처음 깊이 연구하면서 가장 감동이 되었던 말씀이 바로 이 마태복음 1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옛날에 그렇게 지루하게 생각되었던 이 족보 속에도 참으로 풍성한 내용과 메시지를 담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시간이 갈수록 좋아지는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겉모습보다 내용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정말 기대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좋아지는 교회! 저는 우리 성도가 이런 성도가 되기를 정말 원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좋아지는 성도! 여러분! 지금 조금 부족한 모습이라도 절대 낙심하지 마십시오. 혹 다른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여도 절대 실망하지 마십시오. 믿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좋아지는 사람임을 믿으십시오.

믿음은 시간이 갈수록 좋아지게 만드는 것임을 믿으십시오. 이 사실은 기독교 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면서 새로운 약속의 시대, 신약시대가 펼쳐졌는데,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구체적이고 좋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기독교는 오늘의 모습보다 내일의 발전을 지향합니다. 오늘 본문은 신약 시대의 가장 첫 부분입니다.

이 본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어떤 은혜가 주어졌는지, 복음의 새 역사 안에 어떤 정신이 있는지를 잘 가르쳐 줍니다. 복음의 새 역사 안에는 어떤 정신이 있을까요?

1. 복음의 새 역사에는 남녀 평등의 정신이 있습니다.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대단히 남녀 차별이 심했습니다. 남자들은 기도할 때마다 이런 기도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여자로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공문서에는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족보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의 복음서 첫 장에 4명의 여자 이름을 기록합니다. 3절의 다말, 5절의 라합과 룻, 6절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나옵니다.

이 기록은 복음 안에서는 남녀 차별이 없다는 말을 나타냅니다. 사회를 보면 아들을 낳지 못하면 대가 끊긴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 의식 때문에 지금도 아들을 선호하는 시대입니다.

여권이 대단하다는 미국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결혼하면 여자 성도 빼앗겨 버립니다. 그러나 여권이 강한 미국에서도 이 문제만은 잠잠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에 여자 이름을 굳이 넣었습니다.

복음의 참 의미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온갖 편견과 차별의 악습이 사라집니다. 우리나라 개화기에 여자들에게 조금 숨을 쉬게 한 것이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그 당시 여자가 학교를 다니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학교를 만든 것이 바로 기독교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남녀가 같이 한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가장 수지맞은 사람은 여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개화되고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지금도 복음이 없는 나라들을 보십시오. 한결같이 여자들이 구속되어 삽니다.

심지어는 천으로 얼굴을 가리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여성들의 지위를 높여 주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모든 속박 당한 사람을 높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지위를 높여주는 곳에 진정한 행복과 축복이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 잘 사는 나라들을 보십시오. 다 여성들을 높여 주는 나라가 잘 살고 있습니다. 못 사는 나라들을 보십시오. 여성들의 지위가 형편없습니다. 우리의 개인 생활, 가정 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남편을 존중하고, 아내를 존중하는 가정이 잘 살고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문제가 있는 가정을 보면 한결같이 아내들이 무시당합니다. 아내는 가정의 중심입니다. 가정의 온기를 전해주는 사람은 아내입니다.

아내를 한 가정의 중심으로 삼고 살면 아내가 교만해 질까요? 아닙니다. 대개 지혜롭고 책임감 있는 아내가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 있는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없는 사람을 무시하는 문제가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반대의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없는 사람을 무시해서도 안되고, 있는 사람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사람의 처지를 바라볼 때 우리는 겸허한 시각을 가지고 그의 현재의 처지를 이해해 주고,

그의 현재의 삶과 모습을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할 일입니다.

2. 복음의 새 역사에는 인종과 지역을 초월하는 박애 정신이 있습니다. 인종 문제 지역문제는 정말 무서운 문제입니다. 서로간의 증오와 적대감이 정말 무섭습니다. 누가 살인을 많이 저지르면 살인마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종문제, 지역문제에 깊이 들어가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살인마 이상의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로 대량 학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들을 무서운 편견으로 대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결국 그것이 유대인들의 핍박을 자초한 화근이었습니다. 편견의 화살은 결국 자기에게 돌아와 자기를 쏩니다.

바로 그런 시대에 마태는 이방 사람을 족보에 기록했습니다. 라합은 가나안 출신이고,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의미입니다. 인종문제 지역문제는 사상으로도 치유되지 않습니다.

오직 복음으로만 치유될 수 있을 뿐입니다. 복음을 가진 우리는 정말 박애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그 사랑이 자기 안에만 머물면 힘이 없습니다. 박애정신으로 표현되어 세상에서 그 힘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물질적인 이기주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유능하고 똑똑하고 돈을 벌어도 박애정신이 없으면 그 인생은 절대로 향기 나는 인생이 되지 않습니다. 슈바이처를 흠모하는 것은 그의 학식이나 의술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헌신적 삶과 박애정신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나만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사람이 나만을 위해서 살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봉사할 때 주어지고, 헌신할 때 주어집니다.

요즘 독신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독신으로 사는 가장 큰 이유는 봉사하기 싫어서입니다. 봉사하기 싫기 때문에 주어지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결혼 생활의 고독, 인생의 무의미, 활기 속의 공허함뿐입니다.

나를 죽이고 사랑의 폭을 넓혀 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나도 행복해지고 남도 행복해지지만 내가 죽지 않으면 남도 불행해지고, 나도 불행해집니다. 그러므로 나와 내 주변이 조금 희생하더라도 폭넓은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은 결국 우리들의 축복으로 귀결됩니다.

3. 복음의 새 역사에는 과거 용납의 정신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했던 대상이 둘 있었습니다.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들을 친일파처럼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경멸했던 사람이 창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복음의 족보에는 그런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합이라는 여인, 다말이라는 여인, 밧세바라는 여인이 다 그렇습니다.

라합은 이방인이고 기생이었습니다. 다말은 창녀로 변장해서 시아버지와 관계해서 아이를 낳은 여인입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는 남편이 전장에 나갔을 때 다윗과 정을 통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이런 여인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자기 족보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슬그머니 빼버릴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미화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런 사람들을 집어넣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창녀도 용납하고 세리도 용납합니다. 출신지역도 용납하고 직업도 용납하고 과거도 용납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위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꾸 과거를 문제삼고 들춥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과거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족보를 보면 생각을 뛰어넘고 인습과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예수님임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주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음을 이 족보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과거를 용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억이 아무리 쓴 기억이라도 복음 안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과거의 폭행과 수치... 안 좋은 기억... 그 사건을 용납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건의 가해자를 용납하십시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음 안에서 용납하셨는데 내가 왜 못하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정말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것을 나도 용납하는 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4. 복음의 새 역사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의 족보는 예수님이 순수한 인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또한 철저한 인간임을 말하기 위해 복음서 첫머리에서 인간의 족보를 열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태어나시고 성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만으로도 그 안에는 강한 사랑의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본문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흥망성쇠가 여기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처럼 강성하던 때에도 함께하셨고 노예 때, 몰락했을 때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수많은 고난의 흔적이 이 족보에는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뿌리에서 예수님을 탄생시켰습니다. 고난 중에서 모든 희망이 없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개입해서 다시 회복시키는 역사. 그것이 바로 족보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줄거리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미래도 너무 부정적으로 보거나 너무 지나치게 불안하게 생각하며 볼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역사를 사단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배하시기 때문입니다.

5. 복음의 새 역사에는 인생과 역사의 대안이 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의 교만함과 우월감은 정말 심했습니다. 지배를 받는 민족이면서 지배하는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멸시합니다.

인종차별, 지역차별, 직업차별 등 각종 차별이 심했습니다. 소경도 세리가 준 동전이라면 그냥 던져 버립니다.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세리의 동전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른 것도 겸손하지 못하게 표현되면 허황된 우월감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 속에 이방인, 죄인이 있다는 것은 허황된 우월감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에게 던지는 회개의 메시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회개의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이 죄성!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입니까? 그 대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하나님의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해결의 역사가 있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대안임을 알고 다시 한 번 주님의 성육신의 역사를 마음 속에 이루어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한규 목사

『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시 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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