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사랑방

믿음

♤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복음!! ♤

chajchul 2015. 9. 26. 17:48

     ♤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복음!! ♤

저는 오늘 제가 최근에 새롭게 발견하고 깨닫게 된 복음의 중요한 특성 세 가지를 존경하는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기독교 복음의 하나의 특성은 약함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역설적입니다. 약할 때 강하고 어리석을 때 지혜롭게 되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문제 중의 하나는 너무 강하고 너무 지혜로워진 것입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인 존 스토트 박사는 2000년 7월 영국 케직 사경회에서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적 진리의 하나는 약함과 어리석음에 있다. 십자가의 복음 자체가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헬라의 지혜로 포장하지 않고 로마의 웅변술로 각색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말의 지혜와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설교를 너무 지혜롭고 유창하고 멋지게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말입니다.

참된 복음 전도자의 특성도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깊이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한국교회는 너무 커지고 너무 강해지고 너무 지혜로워졌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너무 위대해져서 거의 우상화 하게 되었습니다.

이민교회 지도자 한 분이 최근에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너무 크고 높아서 쳐다보면 머리가 어지럽다고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너무 크고 강하고 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사회로부터 실망과 불신을 받기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약함을 통해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강함과 능력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리석음을 통해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지혜를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둘째 기독교 복음의 또 하나는 특성은 착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강조해왔습니다. 세 가지 모토가 기독교 복음의 중심과 기초가 되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세가지 모토에 약점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말씀만을 강조한 나머지 말과 지식에 치우치게 되었고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행함을 등한시 하게 되었고 은혜만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소홀이 하며 감정만 강조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교회에 설교와 신학과 은혜 체험이 풍성하게 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너무 풍성하고 신학이 너무 풍성하고 은혜 체험이 너무 풍성한 나머지 말만 잘 하게 되었고 비판만 잘 하게 되었고 감정만이 풍부한 이기주의자들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한동안 은혜로운 설교를 너무 사모해왔고 깊은 신학을 너무 동경해왔고 은혜체험을 너무 사모해왔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저는 설교는 은이고 신학은 동이고 체험도 동이고 삶이 금이란 말을 중얼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기려 박사를 존경하게 되었고 이기풍 목사를 존경하게 되었고 송명희 시인을 존경하게 되었고 성 프랜시스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장기려 박사가 죽었을 때 한국교회와 사회는 작은 예수가 죽었다고 칭송했고 한경직 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고훈 목사는 참 목자를 잃은 텅 빈 세상이 되었다고 슬퍼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저들은 지식을 나타내 보여주기 전에 예수 닮은 착한 삶을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예수님 닮은 삶을 나타내 보여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더듬어 살피면서 주일마다 설교를 했습니다.

길선주, 이기풍, 최권능, 조만식, 이승훈, 유관순, 주기철, 손양원, 장기려, 한경직, 송명희 프랜시스, 브레이너드 등등 우리들에게 주신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더듬어 살피며 주일마다 설교를 하면서 저는 얼마나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셋째 기독교 복음의 또 하나의 특성은 주변지향적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특성 중의 하나는 자기 중심 또는 중앙 집중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 민족은 한 반도라는 지형적 특성과 유교라는 사회 문화적 전통의 영향을 받아 개인 중심적이고 가문 중심적이고 지역 중심적이고 민족 중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반도 안에 있는 한국 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카나다나 미국에 이민 온 한국 민족도 종족 중심적 삶의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들 끼리 모이는 social club의 성격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게토화의 현상까지 나타내고 있는 것이 이민 한인교회의 문제점이라고 산타클라라 연합감리교회의 김택규 목사가 최근에 지적했습니다.

인간과 민족의 특성은 자기 중심적이고 민족 중심적인데 비해 기독교 복음의 특성은 주변 지향적이고 이방 지향적입니다.

여기 주변 지향적이라는 말은 사회의 중심에서 떠나 주변이나 변두리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소외된 게토를 이루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그 사회 안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일치와 동화의 삶 즉 성육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복음은 이미 주변 지향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축복하실 때 그의 관심을 자기 본토나 아비 집에 두지 않고 “땅의 모든 족속”(창12:3)에게 두도록 했습니다.

이사야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그의 사명을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는 이스라엘 회복에 머물지 않고 “이방의 빛을 삼아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사49:6) 하는데 두도록 했습니다.

요나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그의 관심이 이스라엘이 아닌 앗수르의 구원에 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네가 망하기를 원하는 니느웨를]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1). 니느웨는 그 당시 ‘악의 축’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악의 축’이었던 애굽과도 ‘선의 축’(?)이었던 이스라엘이 교류하고 함께 세상의 복이 되는 날이 온다고 예언했습니다(사19:23-25).

하나님의 마음과 눈은 물론 그의 자녀들을 향하고 계시지만 그보다는 ‘주변’과 ‘땅끝’과 ‘이방’을 바라보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인종적 정치적 불의와 죄악이 가득한 주변에서 신음하는 잃은 양들을 향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사회, 인권 개혁도 중요하지만 복음과 사랑을 품고 그저 주변과 이방으로 찾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주변 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김 명혁 목사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비판, 비방, 상호비난, 도배성의 답글들은 운영자의 직권으로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