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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

극소수의 사람만이 천국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하세요.

chajchul 2019. 6. 1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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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지옥은 있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천국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하세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소수의 사람만이 천국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이 우리 중에 드문 것은 무슨 까닭인가?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대답이 있다.

즉, 오늘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규정하신 조건보다 훨씬 더 쉬운 조건으로

천국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음란한 세대는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유일한 길을 걷지 않고도 그것에 닿을 수 있으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지 아니하고도(마16:24)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사람들은 만일 그들의 오른 눈이 죄를 범하면 그 눈을 빼어 내버려야 하며 그들의 오른손이 죄를 범하거든 그 손을 찍어 내버려야 한다는(마5:29-30)사실을 믿지 않으며, 또한 그들이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라는(롬8:13)말씀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있으며 '두 세계를 이용하는데' 성공할수 있다고 믿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이나 '협착한 길'과 같은 교훈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신 초대에 응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 나아가는"것이다.

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또한 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잘못 설명하고 있는 '모든 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올 수 있기 전에 방탕한 생활로 세월을 보냈던 먼 나라를 떠나야 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얼굴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등을 돌려 우리의 고질화된 모든 죄를 다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시므로 결코 죄의 사역자가 되실 수 없다.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거역하여 마음을 닫아 버리는 것이다.

젊은 관원이 기꺼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는 뜻을 나타낸 후에

재물을 사랑하여 슬퍼하며 그리스도를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무엇이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로 하여금, 오직 밭을 갈고

소를 판별하는 일에만 열중하게 하고, 오라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게 하였던가?(마22:5)

 

"이와 같이 탐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쓰레기더미 아래나 바다 밑바닥에서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들이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한 가지 대상에만 전념하는 것은 또 다른 하나를 보지 못하게 한다"(S.차녹 Chamock).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의 서두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행하기에 쉬운 일이 아니며 또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13:24)고 하신 또 다른 경우의 말씀에서도 그것이 실행하기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있다.

 

주님께서 그러한 표현을 사용해서 말씀하신 것은 이름뿐인 신앙고백자들의 특성인 태만과 부주의를 분명히 암시하고 있으며, 또한 실로 어렵고 만만치 않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헬라어로 '힘쓰다'라는 단어는 '번민하다'라는 뜻을 가진 매우 인상적이고 힘 있는 말이다. 이 말은 고린도전서 9:25의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는 말씀에서 다시 나오고 있다.

 

그러한 경우는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피나는 극기의 훈련을 기꺼이 참아내며, 그럼으로써 현세의 왕관을 획득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마라톤 경기에 참가하는 육상 선수에 해당하는 말이다. '힘쓰다'라고 번역된 이 말이 골로새서 4:12에서는 '싸우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인 모임에서 손을 들어 '결신'카드에 서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슬프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같이 겉만 번지르르한 말에 속아 왔다.

 

군대가 도시를 습격하듯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마11:12)

우리는 흔히 무력으로 세상의 나라를 빼앗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천국을 그런 식으로 얻게 게 된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여기에서 '침노'라는 말은 불법적인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심사숙고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세상의 것을 빼앗기 위해 하는 불법적인 침노가 아니라

거룩하고 부지런한 침노이며 강렬한 바람이며, 사그러들줄 모르는 불굴의 열심이다.

그것은 모든 어려움을 정복하고 모든 장애물을 뚫고 이겨내려는 결심이다.

그러한 침노는 그 당시에 필요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들을 가로 막는 일이었다.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즉, 불경건한 친척들과 세상의 친구들은 그리스도를 열심히 찾는 자를 방해할 것이나,

그가 찾고자 한다면 그는 그러한 방해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천국은 결코 게으른 자의 안일을 받아 주려고 있는 곳이 아니라

수고하는 자들의 안식을 위해 있는 곳이다"(매튜 헨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문'에 대한 설교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 문의 구조를 연구하거나

문의 설비의 지혜를 찬미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드시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회개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한 설교들은,

우리의 마음을 거기에 응하도록 움직이게 하지 않는 한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좁은 문'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억제되고 속박된'이란 뜻인데,

개역성경에 번역되어 있는 '협착한'이란 뜻이 더 좋다.

그렇다면 이 좁은 문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문'은 두 가지 용도로 쓰인다. 

즉, 문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는 곳이다.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로 들어가는 유일한 수단이며,그 문을 통하여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며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의 나라에서 제외된다.

 

또한 이 '문'의 두 번째 효용은 열 처녀 비유의 끝부분에 엄숙하게 나타나 있다.

필요한 기름(마음속의 성령의 사역)이 모자란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얻으러 갔을 때

신랑이 와서 "문이 닫혔다"(마25:10). 그리하여 처녀들이 주님께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하였음에도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라고 대답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주로 세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진리와 의무와 행복에 대한 가르침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거룩하고 엄중하며 육신을 죽이는 주님의 교훈을 거짓 없이 진정으로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들은 주님께서 강조하신 의로운 주장들과, 우리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타락한 상태와 주님을 반대하는 악의에 대한 주님의 권고의 말씀 안에 요약되어 있다.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해 의심을 품거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언명하신 것에

복종하기를 거절하는 한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구원받기를 바라기 이전에 우리가 전적으로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를 범하고 있는가를 알기 전에 우리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죄의 선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고 우리 안에는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신 것을

진실로 굳게 믿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협착한 길을 건너갈 수 있다.

그것은 곧 죄악과 사탄의 거짓말을 버리고 우리가 좁은 문으로 지나갈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다.

 

둘째로 참되게 회개하는 일이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마4:17).

이 말은 "주님의 길을 준비한" 주님의 선구자가 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면 그는 어떤 방법으로 그 길을 준비하였는가?

 

주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그분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킴으로써 그는 주님의 길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준비하는 데에는 무엇을 행해야 했는가?

그들이 회개하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며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받은 세례를 통하여(눅3:1-6)

자신들이 죽어야 마땅함을 인정해야 했다.

복음은 율법 못지않게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지난 날 우리가 율법을 어긴 것을 슬퍼해야 하며

앞으로는 결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확고하고 성실하게 해야 한다.

 

"여러분은 반드시 죄와 분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화합할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은 모든 죄악을 버려야 한다.

즉, 동굴에서 끌려 나와 태양 앞에서 죽임을 당한 가나안 왕들처럼, 죄는 처리되어야 한다.

여러분은 모든 죄를 버려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며,

주님께 그것들을 극복하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한다"(C.H. 스펄전).

우리가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은 우상과 죄의 쾌락을 버림으로써 가능하다.


셋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자신을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은 "주 예수는 곧 '문'이 아니신가요"(요10:9)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주님은 주님의 중보자적인 임무의 주요한 세 가지 기능에 따라 문이 되신다.

즉, 그리스도는 예언자요, 제사장이요, 왕으로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문'이시다.

구원에 이르는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분을 우리를 가르쳐주시는 선지자로,

우리를 위해 속죄하신 제사장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정으로 죄를 깊이 뉘우치는 마음으로 주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만이

영혼은 그리스도의 깨끗게 하시는 피를 소중히 여길 준비가 된 것이며,주님을 제사장으로 우리 마음에

성실히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주권에 기꺼이 순종함으로써 입증된다.

왜냐하면, 주님은 여러 가지 상징으로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무엇보다 의의 왕이요,

또 평강의 왕이기 때문이다(히7:2). 그리스도의 깨끗하게 하시는 피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싸움의 무기를 기꺼이 버리려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용한 것이다.

그들이 용서받으려면 그 길을 버려야 한다(사55:7)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바침으로써만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는 자가 될 수 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시킴으로써 우리는 좁은 문을 지나갈 수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 권고는 분명히 구원받지 아니한 자들에게 행해진 말씀이기 때문에

철저히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말이다.

'들어가라'는 이 말은 분명히 아직도 밖에 있는 자들을 가리켜 한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말씀하셨겠는가?

참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이교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물론 여호와를 믿고 하나님의 참 말씀인 성경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또한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요8:41)라고 증언한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들의 진리에 대한 지식과 외적인 특권을 누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생명에로 이끄는,

유일한 길로 가는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와 같은 권고는 오늘날 신앙을 고백하고 여러 가지 일을 실천함에도 불구하고,

거듭나지 아니한 많은 교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이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역자들에게 그들의 청중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책임을 깨닫게 하고, 중생하지 않은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의무를 이행하게 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

여기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앞에서의 권고를 강조하기 위하여 그 이유를 말씀하고 계신다.

좁은 문 이외의 또 다른 문이 있는데 그 문은 좁은 문과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것은 '넓고' 또 큰 길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긴 하나, 지옥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풍속'(엡2:2)을 가리키는 말인데 중생하지 않은 모든 자들이 다 그곳에 있다. 그것은 고집과 자기만족의 길이다. 그것은 그리로 들어가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어서 '넓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경계로 정해 주신 계명을 깨뜨렸다.

육체에 속한 자들에게는 그 길을 걷기 위해 분석이나 인내가 요구 되지도 않으며,

그 길에 남아 있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 길이 즐겁고 쉬운 길이다.

 

죽은 고기는 물 흐름에 따라 떠내려가지만 살아 있는 고기는 그것에 역행하여 떠다닐 수 있다.

그러므로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무거운 죄의 법을 지탱할 힘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기계적으로 이 길을 따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모두 내리막길이기 때문에 걸어가기가 평탄하고 수월하다.

 

그 길은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기 때문에" 붐빈다. 그 길은 세속적인 마음에 호감을 주는 것이어서 그 폭 또한 넓다. 누구나 그 길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람들이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그리고 보는 대로 걷고 정욕을 지배하고, 또 자신들의 성벽을 좇아 방종한다해도 그 누구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류는 본래부터 그 넓은 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길을 버리고자 하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 없다. 소돔에서의 롯과 그의 아내처럼 우리 모두도 주께서 그를 불에서 구출하시기 위해 자신의 사자를 보내시지 않았다면 그 멸망의 도시를 떠나기를 몹시 싫어한다.

 

역시 그리스도인들도 멸망의 도시에 남아서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만원'인 길을 보시고 "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사17:12)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 길은 미혹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그 길 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 길이 자신들을

어디로 데려다 주고 있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현명한 행로를 따르고 있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길을 가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고 젊음은 잠시뿐이다. 그러므로 젊은 때에 즐겁게 지내자.

즉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그들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4:12).

그 길로 여행하는 자들은, 누군가가 협착한 길을 좋아하는 '광신자'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결론지은 것이 역시 옳은 일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 길은 치명적인 길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희망 없는 영원한 멸망이기 때문이다.

그 길은 무저갱과 꺼지지 않는 불과 벌레도 죽지 않는 곳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불경한 자의 길이다. 성경은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라고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오! 독자여! 회심하고 죄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 돌아와

거룩하게 생활함으로써만이 죽음의 길을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라.

 
- 아더핑크,'산상수훈강해' 중에서 -

                                                                                      [출처] 천국과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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