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T 스터드의 선교이야기!! ♧
"If Jesus Christ is God and died for me,
then no sacrifice can be too great for me to make for Him."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그분을 위해 하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클 수 없습니다."
C.T 스터드(1862~1931)는 학생 복음 운동의 조상으로 유명한 영국의 '캠브리지 세븐' 중 한 사람으로 졸업 후 46년 동안 중국, 인도 선교를 하고 중앙 아프리카를 개척한 선교사입니다.
20여년간 중국에서 사역하였던 스터드는 1913년 아프리카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를 창설하였다. 선교지로 가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에게 그는 말했다.
"황금을 찾기 위해 도박하는 불신자들도 있는데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도박을 하겠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젊어서는 직업을 걸었고 중국에서는 재산을 걸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목숨을 건, '위대한 믿음의 도박사'였다.
1862년 찰스 토마스 스터드( Charles Thomas Studd)는 삼 형제 중 막내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75년 스터드의 아버지가 무디의 설교를 듣고 와서 변화되었다.
회심 후 그는 세상 연락을 포기하고 오직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됐다. 아버지의 기도로 마침내 1년 후 삼 형제 모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챨스의 관심은 점점 스포츠에 매료되었다. 그는 '크로켓'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며 1879년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 진학했다.
1882년 겨우 대학 3학년으로 '영국의 가장 위대한 크리켓선수' 라는 격찬을 받으며,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므로 10대의 우상이 되었다. 점점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멀어져 가던 어느날, 그의 삶을 크게 바꾸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형, 죠지가 위독하여 죽게 되었다. 삶과 죽음사이를 오가는 형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을 하게 될 때 무디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곳에서 다시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게 되고 그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고자 결단하였다.
대학內 영혼구원을 위한 열정으로 그와 6명의 친구들에겐 '캠브리지 7인'이란 별명이 붙여졌다 이 '캠브리지 7인'은 지금까지 학생복음운동의 조상이요 대명사가 되었다. 중국 선교사로 드디어 1885년 2월, 이들 7인은 중국으로 가는 항해 길에 올랐다.
그는 유산으로 받은 수십 억의 재산을, 말씀에 순종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자신은 다른 선교사들처럼 믿음으로만 생활을 유지하며, 7년 동안 800명의 마약중독자들이 새 삶을 살도록 도왔다.
1894년 건강의 악화로 중국에 온 지 10년만에 영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 이후로부터 6년동안은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도 미국과 유럽 전 지역 캠퍼스를 순회하면서 학생들에게 선교 비전을 심는 선교 부흥집회를 가졌다.
이러한 부흥회를 통해 수백 명의 학생들이 해외 선교사로 자원하게 됐다. 1900년에 6년간 인도선교사로 갔다가 영국으로 돌아와 "아프리카 선교 중심부"라는 선교후원회를 만들고 1913년 아프리카로 떠났다.
18년동안 아프리카 중심부에 위치한 벨기에령 콩고강에서 복음사역을 했다. 식인종 부족들 가운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를 "브와나 무쿠바(위대한 하얀 추장)라고 부르며 존경하였다.
스터드는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했기 때문에 항상 건강이 좋지 않았다. 마침내 1931년 7월. 71세를 일기로 스터드는 콩고 아밤비에서 지병인 담석증으로 소천하였다.
식인종은 선교사를 원한다. 학생 선교자원운동이 1886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선교운동은 거의 50년간 지속되었고 2만 여명의 학생들을 선교사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해외선교분야에 지울 수 없는 공적을 남겼는데 그들 중에 가장 명성이 높았던 사람은 아마 영국의 찰리 스터드(C.T. Studd)일 것이다.
그는 모든 부와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고 세계복음화의 과업 앞에 용기있게 마주 서서 철저히 헌신한 학생 선교자원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넓히기 위해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미친듯이 뛰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세계복음화 십자군의 설립자와 지도자였으며 중국 선교사 10년, 인도선교사 6년 그리고 아프리카 선교사 18년을 사역한 가장 위대한 현대 그리스도인 선교사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부친은 대단히 부유하였고 경마를 매우 좋아하여 그의 말이 영국 리버풀의 그랜드 내셔날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명성 때문에 그가 무디의 집회에 참석하여 회심했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그의 세 아들에게도 꾸준히 전도하여 모두 회심시켰는데 그 중 맏아들인 찰리 스터드가 무디의 집회에서 자신의 일생을 해외선교사역에 드리기로 결단한 것은 또 한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이튼과 케임브릿지에서 크리켓 선수였으며 유명한 캠브릿지 11인팀의 최고의 만능 선수이자 주장이었고 사람들은 그가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크리켓 선수라고 입을 모았다.
그의 헌신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이른바 "캠브릿지 7인"이 스터드와 함께 중국선교사로 선교사역을 하겠다고 헌신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신문은 "선교역사상 이렇게 우수한 학생들이 한꺼번에 선교사로 해외에 나간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가 중국에 머문 기간은 10년이 못되었으나 많은 활동을 하였다. 중국에서 네 딸을 낳았는데 중국식으로 양육했다. 그는 부모의 많은 유산상속을 모두 포기하고 다른 선교사들처럼 믿음으로만 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그는 건강 때문에 귀국하여 6년동안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학생자원운동을 대표하여 선교에 대해 강연함으로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해외선교사를 자원하였다. 그는 1900년에 다시 인도로 가서 6년간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역하였다.
그러나 스터드의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어느 문에 새겨진 "식인종은 선교사를 원한다"라는 문구였다. 그는 예수에 대해 전하려고 결코 가본적이 없는 중앙아프리카의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부끄러움이 마음속에 가득차 하나님께 물었다.
"왜 단 한 명의 기독교인도 가지 않았나요?" "그러는 너는 왜 가지 않았느냐?" " 의사가 절대 못가게 막을 것입니다." "내가 의사가 아니냐? 내가 너를 치료할 수 없겠느냐? 내가 너를 지켜주지 못할 것 같으냐?" 그는 아프리카로 가기로 결심했다.
나이도 이미 50살이며 병들었고 후원자도 없었으며 그의 아내가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1910년 현지답사 후 다음해 아프리카의 마음 선교회(HAM)를 조직하고 1913년 사위 한명을 데리고 콩고에 들어가 그 곳에서 18년간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1931년 그는 현지에서 주님 품에 안겼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 3: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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