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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캄보디아에서 온 편지!! ♡

chajchul 2015. 4. 16. 00:25

 

 

 

 

 



     ♡ 캄보디아에서 온 편지!! ♡

캄보디아의 빈민 마을........
맨처음 비참한 빈민촌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할 때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단 한번도 선교에 대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캄보디아에
왔기에 더욱 더 힘들었습니다.

그저 말로만 듣고 신문 방송으로만 보고 들었던 그런 처참한
빈민 마을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것도 캄보디아란 국가 이름보다 .킬링필드.란 무서운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더욱 더 유명하게 알려진 캄보디아가
빈민 마을이 저의 선교지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
피부병으로 온몸이 얼룩진 빈민 마을의 아이들........

반찬이 없이 그냥 밥에 장을 말아 먹으면서도 그것도
감사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

벌거벗은 아이들과 이들을 그냥 무한정 방치하는 부모들.....
처절하게 더러운 물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 마다
저는 이들을 외면했습니다.

가까이 하고자 했지만 가까이 할 수 없던 캄보디아의 빈민촌
아이들과 청년들.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파도 병원에도 못가는 아이들과 주민들이
대부분이었고 학교에 갈 학비가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전도'하고 '선교'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때 느끼고 배운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면

하나님께서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성경에
적어 놓으셨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던 우리의 주님.
도저히 용서받아서는 안될 나까지 용서해 주신 우리 예수님,

주님의 놀라운 '은총'과 '사랑'을 신학교에서 배웠지만
실제 실천하기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제가 주님의 하나님의 온전히 감당하고 빈민 주민들을
'사랑'하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맡겨 주신 '양떼'를 돌볼만큼 바로 제 자신이 미처
'준비'가 안되었고 '변화'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것인지
몰랐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받을 줄 만 아는 '영적 거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냥 입으로
찬양만 하고 입술로만 기도만 했던 것입니다.

준비 안된 자의 비참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일을 하기 위해 준비가 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나누어 주지 못하는 자의 비참한 .내적 갈등.과 나의 가족과
나의 행복만 추구하는 영적 구두쇠로서의 처참한 갈등이
엄습해 왔습니다.

바로 이 때부터 내가 먼저 '변화'되게 해 달라고 눈물로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를 준비시켜 주시고 변화시켜 주소서.

주님,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하여 새롭게 하여 주소서.

주님, 주님...
저를 왜 이런 비참하고 처참한 땅에 준비도 시키지 않고
변화도 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보내셨습니까.

 

세상에 수많은 사역지가 있는데 왜 저를 이런 곳에
보내셨습니까.

자신이 없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렵습니다.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비참하게 사는 캄보디아의 빈민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섬기고 보살펴야 할
대상이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한 달 두 달 시간은 자꾸 흘러 갔습니다.

어느날 우체국에 가서 사서함을 열어 보니 한국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어느 주일 학교 선생님의 간절한 편지였습니다.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너무 어려

'옷'에다 용변을 보고 콧물을 흘려
너무나 더러워 주일 학교 선생님을 하기가 어렵다는
편지의 내용이었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이 저에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 왔습니다.
이 편지가 저의 가슴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오토바이 택시 뒤에 앉아 우체국에서 집으로 오면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저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 내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한참 기도한 후 옷을 갈아 입고 밖으로 나가
그 더러운 빈민촌 아이들을 끌어 안았습니다.

주님,
제가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전혀 변화되지 않고 선교사로 왔습니다.
용서하소서.

그 날 이후 빈민촌 아이들과 청년들이 정말로
눈부시게 보였습니다.

손톱과 발톱을 잘라 주고, 이발을 해 주고,
목욕을 시켜주고, 옷을 나누어 주고,

아픈 아이들과 청년들은 물론
동네 주민들을 병원에 보내 치료를 시켜 주고,

백내장 수술을 시켜주고,
그렇게도 배고파하는 아이들에게 날마다 과자와
과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동네 주민들이 입고 있는 옷을 달라고 하면 벗어 주었습니다.
주민들이 달라고 하는 것은 가능한 모두 다 주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 주었습니다.
서서히 동네 주민들의 생각이 바꾸어 지면서 '변화'가
일어 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내가 '변화'되자 저의 주위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변화되자 '주님의 사역'에 활기가 생기면서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캄보디아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캄보디아는 실로
정세가 좋지 않았습니다.

내전이 발생하고 총선거가 임박해 오면서 치안과 정세는
더욱더 나빠져 갔습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어 언제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참으로 위험한 나날들이 계속되어 갔습니다.

저의 선교관 주위는 가장 위험한 지역중의 하나였기에
거의 매일 밤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총소리가 들리면 식사를 중단했습니다.
총소리만 들리면 불을 끄고 일찍 잠을 자곤 했습니다.
때로는 초저녁부터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느 날 밤 12시 20쯤부터 새벽 1시까지 40여분간
집중적으로 '총격전'이 저의 선교관 주위에서 발생했습니다.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밤만 살려 주시면 내일은 싱가폴이나
한국으로 돌아 가겠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무서운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알아 보니 3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주민들은 이미 지난 밤 오토바이로 전 가족들이
피신하고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난간 주민들이 돌아오자 아이들과
청년들이 다시 선교관에 와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집을 나서기전 기도했나요,
오늘 받을 은총위해 간구했나요.
 기도는 우리의 헌신  '빛'으로 인도하리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세요.'

제가 가르친 찬송가를 그것도 '한국말'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지난 밤의 공포로 놀란 .마음의 아픔.과 .절망.이 녹아 흘러 내렸습니다.

당장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지면서 이 처참한 캄보디아
아이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과 고통이 여기에서 멈추거나 끝나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거의 매일 밤마다 들려오는 총소리보다 더욱 더 무서웠던
것은 끊임없이 저를 괴롭히는 살이 썩어 가는
'악성 피부병'이었습니다.

발이 썩어 가고 눈을 뜰수 없을 만큼 눈동자가 아팠습니다.
상수도와 하수도 시설이 없어 '수질'이 지극히 나쁜 물을

사용해야 하기에 '악성 피부병'과 '안질'과 '다양한 질병'으로
견딜수 없는 너무나 많은 고통이 찾아 왔습니다.

제가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난관이 너무나 많았기에
매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무조건 복종하고 이 어려운 땅 캄보디아에 왔으니
지혜를 주시어 모든 어려운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담대함을 주시어
협박하고 납치하려 하는 세력들에게 굴복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서로가 '언어'가 통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캄보디아의 아이들은 '영어'를 모르고 저는 캄보디아 말을
할 줄 몰라 손짖, 발짖으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감사한 것은 제가 일본어를 구사 할 줄 알아 '한자'를 알고 있어
캄보디아의 11살의 중국 화교 남학생에게 '중국어'를 배워 가면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있었습니다.

낮에는 제가 '중국어'를 배우고,
밤에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낮에 배운 서툰 중국어를

사용하여 '성경'과 '찬송가'와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11살의 어린 소년이 서투른 저의 중국어를 캄보디아 말로
'통역'을 해 주었습니다.

 

눈물겨운 사역이 1년 365일 하루도 쉬지않고 이렇게
날마다 계속되었습니다.

매일 영어를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고, 찬송가를 가르치면서
'기도'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아이들이 예수님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해 안타까워

서로가 얼마나 울면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1년간은 서로 눈물로 눈물로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더 나아가 너무나 가난하여 먹을 것이 부족하여 항상
배고파하고 학비가 없어 학교에도 못가고 아파도

병원비가 없어 의사에게도 갈 수 없는 빈민촌 아이들과
청년들은 물론 동네 주민들을 돕고자 저의 먹는 것을 줄이고
아껴 가면서 돕기 시작했습니다.

먹을 것을 줄이자 저도 배가 고팠습니다.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전달하기 위해서 먼저 '구제'를 해야 했기에 먹을 것을
줄이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극심한 영양 실조와 처참한 가난과 빈곤으로 날마다
빈민촌 아이들과 청년들은 물론 동네 주민들이 아파
쓰러져 갔습니다.

너무나도 가난한 동네 어린 아이들과 청년들이
배고파 하기에 '목사'이며, '선교사'인 제가

하루에 3끼 식사를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날 성경을 가르치는 도중 배가 너무 고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청년들이 깜작 놀라 병원으로 가자고 했을때 '물'을
마시면 괜찮다고 하면서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면서 '성경'을 계속 가르쳤습니다.
이런 어려운 고난을 통하여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과 청년들이 많이 모이자 더욱더 적극적으로
'성경'과 '찬송'과 '기도'를 강조하며 가르쳤습니다.

서서히 이들이 영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급성장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언어와 행동과 생각하는 것에 제일 먼저 변화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캄보디아 아이들과 청년들이
'유행가' 대신에 찬송가 만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구슬치기, 땅뺏는 게임과 도박 대신에 성경을 날마다
규칙적으로 읽고, 찬양 부르기를 좋아하고,
날마다 열심히 기도하고, 영어를 배우고 한국어를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선교회에서 기술 학교및 직업 학교를
보내 주자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싸우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이기적인 빈민촌 청년들과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엄마, 아빠와

친구들에게도 전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르치면 가르치는데로 따라 왔습니다.
기도를 하라고하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라 하면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찬양을 가르쳐 주면 허기진 배고픈 배를 붙잡고 너무나
열심히 불렀습니다.

이 영적인 불모지에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캄보디아 빈민촌을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캄보디아 빈민촌에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치도 않은 또 다른 어려움이 찾아 왔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믿자 견딜수 없는
핍박이 닥아 왔습니다.

자기 아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그것도 친 엄마가 노끈으로 아들의 목을 묶어
숨을 못쉬게 하고 '쇠파이프'로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도 그 청년은 예수님을 배우러 한시간 더 빨리
선교관에 와서 한참동안 울면서 기도한 후 혼자
청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저의 마음은 몹시 아팠습니다.
14살의 어린 캄보디아 소녀가 갑자기 '행방 불명'이 되었습니다.

이 소녀의 친 엄마가 자신의 딸을 외국의 사창가에 팔기
위해 감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소녀의 어머니는 이미 3명의 딸을 이미 팔고 난 후
이제 '막내 딸'마저 외국의 술집에 팔려고 한 것입니다.

모두들 기도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이 소녀의 친 아버지가 5일간이나 칠흑같은
동굴에 감금된 딸을 찾아 다시 하나님을 공부할 수 있게
선교관에 보내 준 것입니다.

동네 아이들이 밤에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갈 때
'불량배'들이 무엇을 하고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온다고 하자, 남녀 8명의 어린 학생들을
땅바닥에 엎드려 놓고 권총으로 위협하며 또 다시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를 믿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지만 그 다음날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공부하러 왔습니다.

어느 여전도 회원은 이제 남편으로부터 '아내의 자격'을
박탈 당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라고 할 때 죽어도 더 이상 우상을 숭배할 수
없다고 하자 남편이 많은 친척들 앞에서 오늘부터
이 여자는 더이상 '내 아내'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다른 젊은 여자를 공식적인 아내라고 선포해 버린 것입니다.
이 여성도님이 남편을 위해서, 그리고 모든 친지를 위해서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저희 성도님의 가정도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몹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가게를 운영하는데 동네
사람들이 물건을 사 주지 않기에 생활에 극심한 타격이 오고,
견딜 수없을 많큼 모욕과 비난과 핍박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정도 자신의 동네를 위하여 '순교'하겠다고 합니다.
감사한 것은 이 가정을 통하여 교회가 개척이 되어
이제 교회를 짓기 위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극적인 '변화'도 있습니다.
15살의 어린 소년이 '마약'을 하고, 권총으로 사람들을
협박을 하고,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타고 폭주족을

하던 불량배가, 여름 수련회에 참석한 후 변화를 받고,
'지난 나의 모든 것은 이미 죽었고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나는 다시 태어났다고'
고백한 후 날마다 밤늦게까지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주일학교 선생님이 되자

그의 어머니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영접한 후
저희 '소망 교회' 여전도 회원이 되신 것입니다.

어느날 캄보디아 정부로부터 고아원을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먼저 한달간 사역을 해 보기로 하고 저와 저의

한국 동역자와 캐나다 '앤토니'라는 친구와 함께
130여명의 고아 아이들을 보살피기 시작했습니다.

먹을 '빵'과 '옥수수'와 '감자'와 '쌀'을 사서 먹이고
구호 물자를 전달하면서 성경과 찬송가와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3주일째 책정된 예산이 없어 저희들의 생활비를
절약하여 고아들을 돌보는 도중 3사람 모두가 똑같은

증세로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아 보았더니 지나친 '양양실조'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고아원을 돕기 위한 예산이 전혀없어

저희들의 먹을 것을 절약하여 사역을 계속한 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 고아원 사역을 포기하고자 마지막
결정을 하고 빵과 옥수수를 사들고 고아원으로 가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비참하고 처참하고 살아가는 고아들이 그 날은 빵과
옥수수를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3명도 같이 함께 울었습니다.

불쌍한 고아 아이들이 '느낌'으로 오늘이 '마지막이란
것을 아는 것 같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3명이 다시 모여 앉아 기도를 하고 난 후
제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굶어 가면서라도 고아 아이들을 계속 돌보아야 겠다고
나는 결정했는데 두 사람의 의견은 어떠하느냐고 묻자
두 사람 모두 자신들도 굶으면서 고아 아이들을 가르치고
돕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3 사람 모두에게 함께 하여 주신 것입니다.
더욱더 감사한 것은 '앤토니'라는 친구는 캐나다 사람으로
한달간 단기 사역을 하러 이곳 캄보디아에 잠깐 왔는데 기꺼이

저희들 사역에 동참하여 준 것입니다.
이렇게 고아원 사역은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날 고아원의 학생이하는 말이,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이제는 울지 않겠습니다.
나에게도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열심히
살아 가겠습니다.'

이런 고백을 듣고 우리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시작된 고아원 사역을 통하여 이제는
고아원 주위의 빈민촌의 아이들을 받아 드려
수많은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3번이나 결정적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2번이나 모기에 물려 죽음 직전에 갔으며,

한번은 이유없이 심장이 식으면서 온 몸이 굳어 갔습니다.
제가 죽어 간다고 많은 동네 사람들이 최후의 순간을 보기 위해
저의 방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설교를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이곳 캄보디아에 왔습니다. 저의 사명인 '전도'를 여러분에게
미처 완수하기 전에 죽게 되었으니 제가 죽더라도
'예수님'을 믿으십시요.

그분만이 여러분을 구원하실 것이며, 그분만이 여러분의
구세주가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울면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의 마지막 순간을 보러 오신 동네 분들이 지금은

저희 캄보디아 빈민촌 '소망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몇달전까지만 해도 풍토병에 걸려 양쪽 다리가 썩어 갔습니다.
하루에 12대씩 주사를 맞았지만 캄보디아에서 치료를
하지못하고 결국 한국으로 치료하러 갈 때 저희 '소망교회'
온 성도들이 눈물로 눈물로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불량배들이 돈을 요구하기 위해 저를 납치하려고
하는 위험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때마다 지켜 주셨습니다.

그렇게도 힘들고 어려울때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외롭지 않게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그렇게도 위험한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아플때마다 저의 아픈 상처를 만져 주셨습니다.

그는 나를 만졌네 내 영혼을
나는 그를 느꼈네 그 숨결을
그는 나를 버리지 아니라고
나는 그를 떠나지 아니하리

그의 사랑 있으면 나 외롭지 않아
그의 사랑 안에서 나 두렵지 않네

그는 나를 만졌네 내 영혼을
나는 그를 느꼈네 그 숨결을

그는 나를 버리지 아니라고
나는 그를 떠나지 아니하리

이 찬양을 듣고 더욱 더 힘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저희는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희 캄보디아 '소망 교회'에는 반주를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2명의 여청년과 한명의 남청년이 한국에 있는 모교회에 초청받아
피아노와 키타를 배우고 돌아와 이제 캄보디아

'소망교회'도 반주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년동안 전혀 음악이 없이 찬양을 부르다가 이제는
한국에서 배운 피아노와 키타로
반주를 하면서 찬양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학비가 없어 초등학교에도 못다니는 고아 아이들을 
한국의 모교회에서 145명을 학교를 보내 주어

그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놀라운 '은혜'라 믿습니다.

우리 캄보디아 청년들이 한국에 한번 가보는 것이 기도 제목입니다.
가르치는 선생님이 한국 사람이고 목사님이 한국 사람이어서

선생님의 나라, 목사님의 나라에 한번 가 보는 것이
간절한 바램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저희들의 소망이 너무나 많아 '소망 교회'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소망이 캄보디아 빈민 마을에 교회를
건축하는 것입니다.

3층으로 건축이 될 예정입니다.
건축 기금을 위해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장소가 좁아 더 이상 성도들을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기도를 부탁드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소망교회'를
통하여 확장되고 '그의 의'가 전파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도합니다.

캄보디아 빈민촌 '소망 교회'에서
이영룡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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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여 이 종의 눈물을 기억하시고
진정 낮은 자의 삶,
그리스도의 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진정 사치와 허영의 생각을 걷어가시고
주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사명을 위해
이 몸을 온전히 드리게 하소서...
주님이 걸어가신 길 이 종도 걷게 하소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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