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순교자 문준경!! ♧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순교자가 있지만 여성순교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문준경(1891~1950)전도사는 여성순교자입니다. 그녀가 고향인 전남 신안군의 섬들에 설립한 증동리 교회, 진리교회, 대초리교회 등 10여 교회는 오늘날 기독교를 대표하는 수많은 목회자들(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이만성, 이봉성 목사님 등 30여명)을 배출한 믿음의 산실입니다.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의 작은 섬에서 출생한 문준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해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고 싶어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그러지 못했고 17세의 나이에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결혼을 했으나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두 사람 모두에게 고통일 뿐이었습니다.
외지를 도는 남편은 아내를 돌보지 않은 채 소실을 두고 자녀까지 낳아 살고 있었습니다. 그 녀는 자신을 "남편 있는 생과부" 라며 신세를 한탄하며 살았습니다.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는 큰 시숙과 생활하게 되자 그 녀는 갈 곳 없어 목포로 건너가 단칸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삶의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결교부흥사인 이성봉목사 (당시 전도사)가 초가집 한간을 얻어 막 개척을 시작한 북교동성결교회를 찾았습니다.
이성봉목사의 설교는 실의에 빠져 있던 그 녀의 마음에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기쁨을 채워 주었습니다. 학습과 세례를 받고 개인전도와 축호전도에 열성을 보이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집사직분을 받고는 하나님께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전신)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녀의 전도열정은 남달라 방학마다 고향으로 내려가 33년에 진리교회, 35년에 증동리교회, 36년에 대초리교회를 건립했고 방축리에 기도소를 지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교회를 세운 그 녀에게 수많은 어려움과 고초가 쉬지 않고 따랐으나 기도는 언제나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졸업 후 그 녀는 증도로 돌아와 나룻배를 타고 이 섬 저 섬 무교회지역을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녀는 주민들의 부탁으로 짐꾼노릇, 우체부노릇을 마다하지 않았고 섬 주위 돌짝밭 길을 다녀 1년에 아홉 켤레나 고무신을 바꿔 신었다고 합니다.
그 녀의 열정적인 기도로 정신병자, 중풍병자를 고쳐내 "섬 여의사"란 말까지 들을 정도였습니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결교단은 강제 해산되었고 그 여파는 문전도사가 개척한 증도교회에까지 미쳤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며 목포경찰서로 불려가 고문을 당했지만 그 때마다 찬송가 383장?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를 부르며 "죽으면 죽으리라"를 수없이 되풀이 했습니다.
아무리 회유와 협박이 이어져도 굴욕적인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습니다. 해방이 된 후에는 공산당을 따르는 좌익계의 활동이 이 작은 섬까지 뻗쳤습니다. 특히 6.25 후 지역 전체가 인민군의 손길에 넘어가자 교회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자들이 문전도사와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
50년 10월 4일. 국군이 증동리섬까지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악의에 찬 공산당원들은 교인과 양민들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이끌어 내고는 한사람씩 단도로 내려쳐 죽였습니다.
그들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구만"이라며 그 녀를 몽둥이로 내리쳤고 그 녀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 마지막말을 남겼고 이어진 총탄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 녀의 나이 59세이었습니 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를 우리는 문 전도사님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한 희생적인 복음 전파가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퍼온글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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