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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e 에케 호모)! ♡♥

chajchul 2014. 3. 30. 08:56


    ♧ 이 사람을 보라(Ecce Home 에케 호모)! ♧


진젠도르프는 10세가 되던 해에 할레대학에 입학하여 17세까지 그곳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프랑케와 깊은 유대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 그의 경건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상인 순결한 교회와 순결한 영적 생활에 대한 뿌리가 내면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할레 대학 출신의 선교사 지겐발크와 플뤼차우가 보낸 동 인도 선교에 관한 보고들을 접하게 되었고 1713년에는 플뤼차우가 할레를 방문했을 때 그를 직접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진젠도르프는 할레 재단의 선교적 지원을 보면서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젠도르프는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겨자씨 모임(the Order of the Grain of Mustard Seed)'을 결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증거하고 신앙문제로 고민하는 형제들을 도우며 아직까지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해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들 모임의 목적으로 삼고 활동하였습니다.

그 후 1719년 진젠도르프는 네덜란드와 프랑스로 연구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도중에 뒤셀도르프에서 화가인 도메니코페티(Domenico Feti)가 그린 "내가 너를 위하여 이것을 당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라는 각명(刻銘)이 달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큰 감명을 받게되어 일생을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진젠도르프가 이룩한 괄목할만한 업적은 바로 모라비안 교회를 설립하여 발전시킨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보헤미아 국가 교회의 박해를 피해 헤른후트(Herrnhut)로 피난온 형제단(The Unity of the Brethren)이라고 부르던 모라비아의 후스파(Hussites) 개신교도들이 진젠도르프의 지도하에 기독교 공동체를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 공동체가 '모라비아파'라고 불리워졌습니다.

젠도르프는 모라비안의 형제단을 돌보기 위해 나중에는 드레스덴에서 법정 변호사로 일하던 공직을 버리고 형제단의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으며 루터교회의 신학자로서 인정되는 시험에 합격하고 1727년 모라비안의 감독으로 안수를 받게 됩니다. 진젠도르프에 의한 모라비안 교회는 선교지향적인 교회였
습니다.

 

모라비안 교회는 1732년 레온하르드 도버(Leonhard Dober)와 다비드 니츠만(David Nitschmann)을 서인도제도 (the West Indies)에 파송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 뒤를 이어 1735년에는 그린랜드로, 1735년에는 수리남(Sirinam)으로, 1737년에는 아프리카에, 1740년에는 북아메리카의 인디언과 실론(Ceylon)에, 1742년에는 중국에, 1747년에는 페르시아에, 1754년에는 자메이카에, 1756년에는 안티구아(Antigua)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1760년 진젠도르프가 죽기까지 모라비안 교회는 28년 간의 활동을 통해 226명의 선교사를 배출해 내었고, 1760년 당시엔 그린란드의 13개 지역과 중.북부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서 49명의 형제와 17명의 자매들이 약 6,125명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의 이러한 선교는 독일 개신교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자발적인 선교운동으로서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세계 각처에서 사명을 완수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전체 공동체의 전적인 지원을 통해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선교로서의 전체 교회" 라는 개념을 소개하였습니다. 아울러 개신교내에서 '선교에 대한 책임은 만일 어떤 주어진 지역내에 적법하게 세워진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를 통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교회의 지역적인 견해(the territorial view)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심지어는 유럽 식민지의 권력자들의 외국 전초기지들도 새로운 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곳이 되었
습니다. 선교의 전진은 더 이상 전통적인 교구의 경계에 의해 제한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젠도르프의 사후에도 모라비안 교회는 다른 교회로서는 이루지 못한 헌신적인 표준을 세워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인도제도로 건너간 모라비안들이 2백년에 걸쳐 3천명의 선교사를 지원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낳았고 해외 선교구에 속한 신자의 수가 내지 교회의 신자의 수의 3배나 되는 특수한 예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들 모라비안 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개척적인 역할을 감당했을 뿐 아니라 어려움을 참고 이기며, 고난을 달게 받으며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활동하였습니다. 모라비안들은 그린랜드와 레브로돌 (Labrador) 그리고 알라스카와 서인도제도, 동부 및 남부 아프리카와 빅토리아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했으며 국내 전도에도 매우 활동적이었습니다.

모라비안 교회는 비록 작은 교회였지만 그들이 다른 종파에게 미친 영향은 특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라비안 교회의 선교운동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영향이 지역적으로 유럽의 여러 지역과 세계에 널리 미쳤다는 점에 있
습니다.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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