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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 내 잔이 넘치나이다! ♠

chajchul 2014. 6. 17. 16:30


     ♠ 내 잔이 넘치나이다! ♠


소설가 정연희 씨는「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는 명의순 씨의 숭고한 삶의 일생이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의순씨는 평양 장대현 교회 맹관호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해방 후에 월남한 그는 한신대학에 다니다가 한국전쟁을 만나 북한군에게 잡혀서 고문을 당했고, 모진 고생 끝에 부산으로 피난 내려가던 중 미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는데 북한군 첩자로 오해를 받게 되고 결국 포로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2년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중환자들을 돌보면서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주고, 죽어가는 결핵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밤새워가며 위로하고 기도해 주는 거룩한 나날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수만명의 포로 수용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억울하게 거제도 수용소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주변 사람들이 미군당국에 진정한 결과 석방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옥같은 포로 수용소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은 성 프랜시스의 사상적 영향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친구에게 써 보낸 편지에 프랜시스의 기도를 인용했습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받을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천국으로 들여보내시든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그리고 만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가 없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에 남아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겠나이다."

이러한 프랜시스의 기도를 그는 실천하려 했던 것입니다. 친구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담담하게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 곳에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라네. 내가 이 곳에 남아있는 것은 결코 희생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아닐세.

이 곳에 있는 형제들 중에는 나 같은 것이나마 필요로 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밥 한 톨을 가지고 서로 으르렁거려야 했던 그 살벌한 포로 수용소에서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오래 하고 또 그 비참한 환경 속에서 온갖 병자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그의 몸은 약해질대로 약해졌고, 나중에는 몸에 병까지 얻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중공군 포로들은 이렇게 통곡하면서 추도문을 썼습니다.

"1952년 8월 11일 새벽 3시, 우리는 맹선생의 죽음을 통곡합니다. 애통합니다. 선생님께서 환자를 다 씻긴 다음에는 언제나 시편 23편을 중국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시던 음성이 귀에 들려옵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외치시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목자 잃은 어린 양처럼, 어머니를 잃은 고아처럼 슬픈 포로민으로 이제 누구를 바라보며 살 것인지 우리는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목자이신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곡합니다.

맹 선생님 편히 잠드소서. 우리는 맹 선생님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포로 수용소 중공군 병동 환자 일동이 드립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습니다. 그는 저희 한신대학교 선배로 위대한 생을 살다 2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간간히 친구들에게 보냈던 편지들이 모아져서 그의 생애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께 '사랑의 잔이 넘치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참 목자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그 사랑의 잔을 포로 환자들에게 사랑의 잔으로 부었던 것입니다.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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