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 만나기I!! ♤
하나님 만나기1: 외로움을 체험하라!
나는 외로움이 우리를 주님께 주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친구한테 자동차를 빌린다고 생각해봅시다. 나중에 보니 라디오는 고장이 났고 CD 플레이어만 작동이 됩니다. 당연히 친구가 모아둔 CD를 하나하나 뒤적거리면서 들을 만한 노래(그냥 트로트라고 해둡시다)가 있는지 찾아볼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친구는 자기 취향(클래식 음악이라고 해두죠)의 CD만 잔뜩 꽂아놓았습니다.
갈 길은 멀고, 혼잣말을 하는 것도 한두 시간이지, 금방 지쳐버렸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CD에 손을 댑니다. 좋아하기로 치자면 스틸 기타 쪽이지만 높이 뽑아올리는 테너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우선은 그저 들어줄 만한 수준입니다. 적어도 쥐 죽은 듯 조용한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한참 듣노라니 점점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팀파니가 쏟아내는 리듬에 맞춰 심장이 뛰고 첼로 소리를 따라 고개를 흔듭니다. 얼마 뒤에는 이탈리아어로 된 아리아 소품을 따라 흥얼거리기까지 합니다. '어라, 이것도 괜찮은데!'
이제 한 가지 묻겠습니다. 클래식 음악도 듣기 좋다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걸 알게 됐습니까?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된 까닭이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달리 들을 음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침묵이 견디기 힘들 만큼 무거워진 순간, 평생 들어본 일이 없었던 노래를 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분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어하시는지 아십니까?
-맥스 루케이도, '짐을 버리고 길을 묻다'에서
하나님 만나기2: 영적인 공허함을 체험하라
캘리포니아의 산 이시드로의 한 간이음식점에서 피살된 스물한 명의 가족과 하나가 되어 몸부림칠 때, 전쟁에서 행방불명된 이들의 가족들과 함께 괴로워할 때, 일이 없어 놀고 있는 손과 먹을거리가 없어 굶주린 배와 인권을 빼앗긴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느낄 때, 그 때야 비로소 우리는 어째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지 알게 된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천부적인 가난함, 곧 우리가 진흙과 하나님의 입맞춤으로 창조되었음과 먼지에서 와서 먼지로 돌아감을 깨달을 때, 남들의 주목과 존경을 받기 위해 쓰고 있는 명예나 지식, 사회적 지위나 권력 따위의 모든 가면을 벗어버리게 된다(나 자신 얼마나 자주 이런 목적으로 성직자 옷을 입었으며,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 입고 있는 옷을 통해 복종을 강요했는지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영혼의 가난은 거짓과 허위를 부수며 얄팍한 영적 우월감과 유력한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할 필요성을 헤어나게 해준다.
가난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자신의 절대적인 부족함을 깨닫게 한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의 하찮은 노력으로는 영적인 삶의 그 어떤 성장이나 진보도 추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은혜의 역사하심에서 비롯한다. 심지어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가 주님이신 것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 생명은 거저 주시는 덤이다. 우리는 참된 겸손에 다다를 수 있는 가능성에 마주 서 있다. 우리 내면 저 깊은 곳의 영적인 공허함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나는 확신한다.
-브레넌 매닝, '사자와 어린양'에서
하나님 만나기3: 감정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
우리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지배할 수는 없으나 우리의 의지에 대해서는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것이나 주의 것으로 하옵소서.' 하나님은 우리가 느끼는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우셨다.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의 여름 별장에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헌신되고 드려진 의지의 중심 성채에서 살도록 하자.
주님의 식탁에 있으면 영혼들은 때때로 거룩한 감정으로 가득 찬다. 조수는 높고 떠들썩한 기쁨의 여울은 수문을 크게 두드려 넘어뜨릴 것처럼 하고, 자연의 모든 요소들은 기쁨에 넘치는 찬양의 합창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튿날이 되면 삶은 때묻은 회계 사무실, 더러운 상점, 소음 이는 공장, 불경건한 작업장을 대면해야만 한다. 주님과 겸손히 동행함으로 체험하는 오늘의 어려움과 어제의 기쁨을 비교해볼 때, 그것이 정말 어제와 같이 헌신된 삶인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러나 그와 같은 때 우리의 의지가 한치도 변함없이 그 위치를 지키고 있음을 알고 위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나의 하나님, 감정의 홍수는 여름의 시냇물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과 의지는 주님의 발치에서 방해받지 않고 주님과 단 둘이 있었던 축복된 순간과 마찬가지로 오직 주님께만 헌신하고 충성하며 주님만을 바라고 있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이다. 이와 같이 할 때 우리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프레드릭 마이어, '주님의 오묘한 인도'에서
하나님 만나기4: 하나님을 집으로 삼으라
우리 집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고 편안한 곳이다. 우리는 침실이 어디 있는지 주방이 어느 쪽인지 물어볼 필요가 없다. 힘겨운 이 세상에서 온종일 애를 쓰며 살고 난 뒤에는, 우리는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집을 절실하게 그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분이 되실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영양분을 얻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 보호를 구하기 위해 어디로 피해야 할지, 인도를 받기 위해 어디에서 돌아가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집이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듯이, 하나님의 집도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곳이다. 하나님의 집은 누구에게도 침범당한 적이 없고, 벽에는 금이 간 적이 결코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주지가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거주지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주말 별장이나 휴일에 잠깐 들를 방갈로나 여름 휴가를 보낼 오두막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한 번쯤 들르는 호텔이나 노년에 이용할 양로원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지붕 아래서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실제 거주지가 되길 원하신다. 그분은 신용 조회 때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는, 우리가 실제로 소유한 주택이 되길 원하신다. 다시 말해, 그분은 우리의 집이 되길 원하신다. 그분의 아들이 말씀하시는 약속을 들어보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요 14:23).
-맥스 루케이도, '내 영혼을 위한 맞춤공간'에서 <~계속~>
/김종민의 하고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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