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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 20년 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

chajchul 2015. 12. 15. 22:57

     ♥ 20년 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

목사된지 20년 만에야 비로소 나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주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다(?) 얼마나 멋있고 또 부러운 고백인지 모릅니다.
목에다 십자가를 멋으로 달고 다니는 사람처럼...

그래서 이름을 架弔라고 짓고 십자가에 죽겠노라고, 바울처럼 살아 보겠노라고 무척 애도 써 봤지만 십자가에 죽기는커녕 사소한 분도 삭히지 못하고, 용서가 안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니 용서해야하고, 사랑해야하고, 내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한다는 이론 적인 것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도 하고 글도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멀리서만 보는 사람들은 나를 은혜스런 목사로 멋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에게는 가르치면서 내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는 자...

사랑이 능력이요, 용서가 능력이요, 인내가 능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남에게는 그렇게 가르치면서도 정작 나는 할 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선을 가장할 수밖에는 없었고 그러다 보니 불가불 나는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위선자의 고민을 아십니까? 마음에 기쁨과 평안은 없이 말로만, 글로만 사랑을 외치고 용서를 외치는 무대 위 광대와 같은 목사의 심정을 아십니까?

내 자신을 돌아보면 참으로 한심스러웠고 오랜 시간 예수를 믿어 왔다는 것이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대해야하는 목회가 점점 부담스러워졌습니다.
내가 생각해봐도 내 성질은 한마디로 "거지같다" 이었습니다. 누가 나를 목사라고 불러 주는 것이 거북스럽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선생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차라리 거짓없이 천진난만한 애들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선생이 부러웠습니다.

"참아야지,"
"용서해야지,"
"사랑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수없이 마음을 다짐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평생을 기도해왔습니다.

그래도 나는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몰라서 못하는 사람보다도 알고서도 못하는 자의 고통과 갈등, 그 갈등에서 오는 괴리, 이런 것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는 바울의 외침 속에서 나는 오히려 위로를 받았고 "죄인 중에 죄인" 이라는 그의 고백을 인용해서 합리화도 시켰고 변명도 해보았습니다.

그래도 곤고함은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면 나는 나 스스로를 자학하기도 했습니다. 금식도 했습니다. 기도한답시고 몇 달이고 산에서 헤매이기도 했습니다.

내 자신이 미워지고 용서가 안될 때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때로는 마귀나 사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위선적인 삶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그만 끝내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천만번도 더 했습니다. 내가 쓴 시나 단상들은 그렇게 하고 푼 나의 소망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위선자의 고백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속일 수가 있었지만 가까이 있는 동역자나 내 아내는 얼마나 실망했겠으며 안타까워했겠습니까? 내 아내는 나를 연구 대상이라고 까지 했습니다.

나도 내 나름대로도 연구를 했습니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성질은 무엇인가? 성품은 무엇인가? 성격은 무엇인가? 뜻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 정신은 무엇인가?

심리학 적으로,
유전학 적으로,
그러나 어떤 이론이나 학문도 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해도 잠시뿐이었습니다.

기도할 때만 잠깐 평안이 있다가는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목마른 자와 같이 평안을 찾았습니다. 욕심을 내어버리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가지기로 했습니다. 버릴 수 있는 것은 다 버렸습니다.

명예욕 때문이라면 이름도 버리자 싶어서 마지막에는 이름까지도 버렸습니다. 이제는 사단이란 놈이 붙을 자리가 없겠지... 그래도 내게 평안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 안에 있는 한 괴물을 발견한 것입니다. 내 마음 한가운데 자존심이라는 것이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야할 자리에 몸서리 처지는 자존심이란 놈이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존심이라는 놈이 내 속에서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온몸에 소름이 기치는 오싹함을 느꼈습니다.
이놈이 언제부터 내 속에 있었을까?
아마도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이놈도 내 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놈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 나를 지탱케 해준다는 명목으로 나의 열등의식을 먹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놈이 아무것도 아닌 나를 학자인 것처럼 성직자인 것처럼 무슨 대단한 것처럼 위장해 주었습니다.

나는 이놈이 없으면 허물어 져버릴 줄 알고 이 자존심을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보다는 이 자존심을 의지해서 살아 온 것 같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엄청난 발견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한 바울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습니다. 못 박아야할 나라는 실체는 바로 이 지긋지긋한 자존심, 몸서리처지는 자존심이었습니다.

마태복음11장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신 무거운 짐이란 바로 이 자존심 이였습니다. 그리고 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 수고였습니다.

잘못을 하고도 자존심 때문에 사과를 못하고 용서를 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변명하고 합리화시키기에만 급급했습니다. 더욱이 가증스러운 것은 주의 종이라는 위세를 내세워 윽박질렀고 남보다 더 해박하게 알고 있는 성경구절로 나를 변호하는데 바빴습니다.

허세도 과장도 모두 이놈 자존심 하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자존심이 내 속에 들어앉아 은혜도 소멸시키고 평안도 소멸시켰습니다.

이놈은 하나님 자리에 앉아 하나님이 하실 일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자존심을 깨뜨리기 위해서 나를 치셨고 나는 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한 평생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누가 내 자존심만 다치면 아파하고 분해서 견디지 못했습니다.
원수가 내 안에 있었습니다.
이 자존심이 바로 내 원수였습니다.

 

마귀는 바로 자존심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전쟁을 할 것입니다.
이 자존심을 떼어 내버리기 위해서...

이놈이 얼마나 순수하게 물러날 지는 몰라도 기필코 몰아 내겠습니다. 말기 암 덩어리처럼 내 마음 온 구석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이 자존심이라는 놈을 어떻게 하든지 몰아내겠습니다.

그것만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먼저 나와 같이 일하는 동역자들에게 사과부터 시작했습니다. 용서를 구했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동역자들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순간 내게서 봇물처럼 눈물이 터졌습니다. 오십 년이 넘도록 나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놈을 보기 좋게 한방 먹였습니다.

내 안에 자존심을 내려놓기 시작할 때 비로소 오래 참으시고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나는 발견했습니다. 목사 된지 20년 만에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나는 이제 진정한 평안이 무엇인지를 맛보았습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나는 이 글을 씁니다.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이 글을 동역자님들에게 드리는 것은 내가 받은 은혜를 같이 나누고 싶었고 또 내 자존심을 만천하 앞에 내어버리기 위해서입니다.      - 가조선교사 -

『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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