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데반의 반열에 선 장로!!! ♠
최병호 장로는 1873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라면서 기대와 달리 주색잡기로 유명하여 부모의 속을 썩혔다.
그의 부모는 결혼을 시켜 가정을 꾸리면 안정된 생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혼 후에도 그의 행동은 여전했다. 그는 부인을 완도에 홀로 두고 재산을 모두 챙겨 육지에 나와 술과 도박 등으로 탕진했다.
이즈음 그는 먼 친척으로부터 예수를 믿으라는 전도를 받았다. 얼마 후 또 어느 전도인이 그에게 전도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완도로 가기 위해 육지로부터 조그만 배를 타고 가던 중 뜻하지 않게 세찬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누구인가에게 빌어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속으로 전도 받은 말씀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그는 '하나님을 꼭 믿겠습니다. 지난 죄를 다 용서하시고 살려주세요. 하나님!' 하고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완도에 도착했을 때 그는 거의 초죽음이 된 상태였다. 그는 즉시 교회로 가서 배에서 드린 기도를 재 다짐하며 회개의 기도를 다시 드렸다.
그는 그 날부터 죽을 때까지 식을 줄 모르는 신앙으로 평생을 일관했다. 그 후 그는 한동안 선교사 맹현리의 매서인(그 당시는 성경을 팔면서 전도함 )이 되어 강진, 영암, 해남 등지에서 매서 활동을 했다.
어느 날 병재라는 고개를 넘다 도둑떼를 만났는데 목숨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도리어 복음을 전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온 민족이 좌절과 실의에 빠지자 그는 민족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신앙철학을 가지고 많은 교회를 설립했으며 목포 양동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그는 1922년 조선물산장려운동의 목포지역 책임자가 되어 '물산장려가'를 보급하는데 힘썼고 애국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38년 전남 노회가 일제의 강요에 무릅을 꿇고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그는 이로써 양동교회에 더 있을 이유가 없고 신앙의 절개를 꺾고 변절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게 났다는 결심으로 완도로 낙향하여 신앙의 자유와 민족의 해방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쉬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그는 완도에서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며 기도를 하며 찬송을 드리면서 감격의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1950년 6.25 동란으로 공산군은 파죽지세로 대전, 광주, 목포까지 밀고 내려왔다.
드디어 완도까지 점령한 공산군은 먼저 우익계 인사들을 체포 구금하고 고문했다.
평생을 애국운동에 몸바쳐 일했고 더구나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앙적 애국정신으로 계도하던 최 장로는 공산군의 시각에서 보면 소위 악질 반동분자였다.
어느 날 최 장로가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집 대문 앞에서 총을 맨 수 명의 공산군들이 최 장로를 잡아끌고 갔다.
그리고 미제의 스파이요 악질반동자라고 하면서 여러 명이 몽둥이로 무차별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1950년 77살의 노인에게 그것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최병호 장로는 쓰러져 숨을 거두면서 '하나님! 저에게 스데반의 반열에 세워주신 것을 감사 드립니다. 일제 신사참배 때 순교하지 못하고 낙향한 것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시종 웃는 얼굴로 스데반의 모습과 같이 주님 품에 안겼다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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